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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Reset

리델 - 교만, 탐욕

 

 

 

바실리체(basilice). 태초의 공간. 신의 천칭이라 불리는 건물의 최하층. 이곳에서 세계의 균형은 태어났고, 유지되었다. 균형을 지키는 것은 열 네 명의, 특수한 힘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힘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범주에 있는 것으로, 평범한 인간들은 그들을 두려워하며 신의 사자라고 불렀다. 일곱 개의 선을 위시한 존재와 일 곱 개의 악을 위시한 존재는 인간들과 함께 나고 자라며, 그들을 감시하고 세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세계는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쳐서는 안 된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명령(order)이었다. 그들이 있어 세계는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말이다.

 

지루한-그는 입버릇처럼 세상은 너무 재미없어서 죽고 싶을 지경이라고 말했다-시스템을 엎어버린 것은 다자이였다. 어느날 한마디 말도 없이 천칭을 떠나버린 그는 인간들의 세상을 휘젓고 다녔다. 그가 보여주는 힘에 인간들은 그를 지도자, 혹은 그에 준하는 자리에 추대했으며 그는 그것을 당연히 여기며 그 상황을 즐겼다. 그 결과, 인간들은 혼돈에 빠지게 되었다. 세계는 이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세계의 명령으로 다자이를 쫓은 이들은 마침내 그와 태초의 공간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야, 다들 오랜만이네."

"잘도 태연하게 인사한다."

"뭐, 반가운 건 반가운 거잖아? 찾아다니느라 수고가 많았네."

 

다자이는 언제나처럼 상석에 앉아 그들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는 아름답고 오만했다. 자존심, 아니 그것을 넘어선 교만(pride). 그것이 그의 죄목이었기에, 그는 인간들의 위에 군림하며 그들을 휘저었다. 하지만 그것은 본래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다만 지금까지 그를 찾는 데 시간이 걸린 것은, 그가 단순히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세계가 만든 가장 완벽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세계의 일부에 존재해야만 했다. 세계가 간과한 것은, 그의 오만이 세계의 계획을 뛰어넘을 정도로 성장해버린 것이었다. 상석에 앉은 다자이의 말을 가장 먼저 받아친 츄야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바닥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그만 그 자리에서 내려와라, 다자이."

"왜, 네가 여기 앉으려고?"

"그것도 좋지."

"아하하, 할 수 있으면 해 봐. 그게 네 탐욕(greed)이라면."

"그럼 그 전에 일단 내려와주실까?"

"실력으로 끌어내려보지 그래?"

 

다자이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츄야는 그런 다자이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뒤를 흘끗 보았다. 자연스럽게 츄야의 시선을 따라간 다자이는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시선의 끝에는 평소에는 잘 입지 않는 정복을 입고, 안경을 쓰고 있는 검은 머리의 청년이 후드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그의 짙은 녹색 눈동자와 다자이의 갈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턱을 괸 채 그를 위아래로 훑어본 다자이는 조금 쓰게 웃었다. 그리고는 의자의 손잡이에 놓은 손가락을 가볍게 톡, 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청년은 무심하게 그의 행동을 보다가 후드를 긁적이고는 작게 하품을 했다.

 

"란포까지 깨어났을 줄이야."

"…귀찮으니까 얼른 끝내자, 다자이."

"진심으로 할 생각이야?"

"빨리 끝내고 쉬고 싶어."

"아아, 내가 너를 쓰러트리면 어떻게 되려나."

 

란포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덤덤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게 승패는 상관없지, 새삼스럽게. 란포의 말에 다자이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랬지. 란포는 깨어있는 시간보다 잠들어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가 위시하는 죄목은 나태(sloth). 그렇기에 평소에 그는 잘 깨지 않았고, 깰 일도 없었다. 란포가 맡은 일은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 그렇기에 그는 깨어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가 깨어났다는 것은 세상이 이미 많이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뜻했다. 다자이는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위협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의 움직임에 그를 추격했던 이들도 긴장했는지 란포를 제외하고는 전부 자세를 고쳐 잡았다.

 

"나는 말이지, 순순히 리셋당할 생각은 없거든."

"균형의 유지에 개인의 생각은 필요 없어, 다자이."

"뭐, 그렇긴 하지만 말이야."

"…전원을 상대할 생각인 거야?"

"조금 더 즐기고 싶으니까 말이지. 필요하다면."

"…변했네."

"세상을 좀 구경하고 나니까 말이야, 천칭 안은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바실리체의 안은 너무 갑갑해. 우린 실험체가 아니란 말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다자이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가장 먼저 란포를 노렸다. 란포는 그런 다자이의 공격을 걸음을 옮겨 흘려보낼 뿐이었다. 반격을 한 것은 그의 뒤에 숨어있던 아쿠타가와였다. 그가 허공으로 손을 뻗자, 하늘에서는 무수한 돌덩이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바닥에 닿은 돌덩이들은 금세 타르와 같은 시꺼먼 물질로 바뀌어 바닥을 물들여갔다. 다자이는 그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했으나, 뒤에서 덮쳐오는 그림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아차 하는 사이에 요사노의 공격에 그대로 사로잡혀버린 다자이는 허공에 들어 올려진 채 란포의 앞으로 끌려갔다. 란포는 다자이에게 손을 뻗었고, 다자이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또 만나자."

 

눈앞에 머물던 희미한 빛은 이내 어둠으로 바뀌어갔다. 이 어둠이 다시 밝아지는 날에는 분명히 자신은 모든 것을 잊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자이는 알고 있다. 모든 것을 잊게 되더라도 자신은 또 다시 같은 행동을 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때는 자신이 혼자가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마지막에 눈이 마주친 것은 얄궂게도 그의 자리를 가장 탐내던 이였다. 탐욕의 츄야. 그의 눈동자 깊이 깃든 일말의 불안, 시스템에 대한 불신. 다자이는 그에게 물었다. 정말 이대로 괜찮아? 라고. 그 말은 분명히 그에게 커다란 파장이 될 것이다. 천천히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세계가 건네는 약물은 그 무엇보다도 달콤하고 깊은 잠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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