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빰 - 색욕

※커플링: 쿠니다자

쿠니키다군, 그 때 술 산다고 했던 약속 기억하나?
술? 아. 저를 놀라게 하면 술을 사겠다. 어림도 없다는 양으로 생글거리는 표정이 문득 떠올랐다. 맹랑하게 웃었었다. 총신과 이마를 맞대도 흐늘거리던 입꼬리는 종이 열쇠에 한 풀 꺾였었다. 저를 겨누는 총구보다도 열쇠가 신기하다니. 전자는 통상 사람이라면 단순히 놀랐다 할 것이 본능에 울리는 경종으로 한 입 숨을 앙다물만 했다. 하기사 저 사내가 예상값-여타 기술적인 문제를 고려하여 플러스마이너스 오류 범위를 포함하더라도-에 가까웠던 적이라도 있었는지. 나름대로 그 행동양식이 어디로 튈지 감을 빌어보아도 알고 피하는 것인지 모두 헛다리였다. 이어지는 잔상들은 스트레스성 위장염을 부르기에 충분했음으로 고이 한구석으로 접어두었다. 형광등 불빛에 각진 안경알이 처연하게 반짝였다. 
질린 낯색이군, 미루겠나? 말에 반사적으로 부정한 것으로 얕은 회상에 빠져있음을 여실히 드러냈을 터다. 밤색 사내는 답에 만족스럽게 바랜 적벽돌 사이의 문을 밀어젖혔다. 약속시간을 기다리는 어린아이 마냥 신발 밑창을 두드려 경쾌한 소리를 낸다. 저 사내는 항시 호언하는 예언이 들어맞아야만 저리 쇄락한 양색을 한다. 애도 아니고. 혀를 차려는 것을 삼키고 걸음을 옮긴다. 혀를 차봤자 그 예언에 똑 들어맞아 저 사내만 유쾌해질 뿐이다.  

앞서가는 걸음이 가볍다. 저물어가는 볕이 다자이를 감싼다. 따라가는 발자국이 노을에 적셔진 사내의 옷자락을 쫓았다. 뒤 따라 오는 이가 어디를 향할 줄 알고 태연하게 앞만 보며 걷는다. 대화할 의지가 배제된 대답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수다스럽다. 혼자서도 잘 떠든다. 간간히 하던 답을 치우고 붉은 빛이 도는 다자이의 한 면을 본다. 몇 번 생각했지만 이 시간대에 모든게 선명해지는 사내다. 원래의 색이 가물거릴 정도로 붉은 빛을 먹은 머리칼이 그렇다. 다른 면은 검푸른 그림자로 음영이 짙다. 사람이 저렇게 까지 음영이 명확했었나. 언젠가 보았던 원색적인 정물화가 떠올랐다. 마른 향신료가 떠오르는 새빨간 사과가 그림에 있었다. 평소 세심한 관찰과는 거리가 멀었다 해도 사과는 그리 진한 색이 아니었을 터다. 청록 명암칠에 스민 위화감이 거북했다. 집요하고 침착하게 덧 씌어진 괴리감. 석양을 치우면 푸른 음영이 사라질 것이다. 그때에 다시 필연적인 위화감을 느끼게 되는 건 다음의 이야기지만. 윤이나는 구두창 아래로는 청록색 그림자가 이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오히려 사내의 구둣발 아래 어느 곳도 음영이 지지 않아야만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저는 온 몸으로 해를 받아내고서 그림자 하나 흘리지 않는 모양새. 여우가 사람으로 변하면 그림자가 없을까. 여우는 여우 그림자가 질 것이다. 지나치게 편집증적인 몽상을 바로잡아준 것은 지면과 수줍게 흐르는 사내의 그림자였다. 저 예언에 잠겨사는 남자가 왜 이리 기묘한 예감으로 가득 차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길을 찾지 못하겠다. 사내가 몰고다니는 비상식의 전운이 저를 초조하게 한다. 증명을 거부하는 모호함은 한사코 사양하고 싶었다. 기행의 씨앗이 제 전두엽 굽이친 고랑에 꽃을 피웠는지는 자세히 몰라도, 사내가 논리적이지 못한 경로로 뇌리에 흘러들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골몰하는 시선을 느낀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짙푸른 음영이 뺨에 실린다. 왜? 토막으로 끊어낸 질문에 사내는 고개를 거푸 흔든다. 아무것도 아니라네! 경박한 어조를 읊는 입술이 그리는 호선이 선했다. 개구진척 하고 어느새는 강물에 머리를 드밀겠지. 종잡을 수 없는 사내다. 골이 울리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뗐다.


저녁놀이 꺼질 무렵에야 변두리 작은 바에 도착했다. 단골인 건지 넉살이 좋은건지 주인장에게 간단한 안부를 묻는다. 이런 외곽에 바가 있었나. 낯이 설은 곳에 얌전히 메뉴판을 세워보았다. 얻어먹는 마당에 무엇이 적당한지 선을 아려보는 와중에도 옆에서 잡음이 들린다. 아, 눈이 산비둘기를 닮으셨네요, 아냐 청사금석? 침전한 오팔? 무엇이든 혀가 모자랄거에요. 뒷말은 식상할 것이다. 그놈의 동반자살. 조건 반사로 사내의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까딱이고 사내를 안쪽의 테이블로 집어던졌다.
   와, 쿠니키다군 과격해! 좋은 발전이야. 그렇지만 요즘 추세는 공감과 배려지.
   발전은 내 위장염 진행 척도가 그렇고.
여기까지 와서 되도않는 작업질이지. 다자이가 널부러진 의자 반대편에 던지듯이 몸을 내려놓았다. 삐뚫어진 안경 덕에 시야가 반은 뿌였다. 열없이 웃는 낯짝이 반만 선명하다. 되도 않는다니! 섣부른 판단은 관계 진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지. 안그래, 절차적인 로맨티스트? 비꼬는 말에 머리가 울렸다. 고질적인 호색한이 입만 살았다. 병이다, 언젠가는 화를 입을 것이다. 그리 답하면 한참은 배를 붙잡고 구르겠지. 네가 입을 닥치려면 어떤게 좋을까? 안경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었다. 안경을 쓰지 않는다면 사내가 희미하게 보이겠지. 아까 느꼈던 웅숭깊은 전운은 뿌연 시야에 희석되었다. 이대로 안락한 인식의 괴리에 놓이고 싶다. 여기서 저 사내가 행색을 통으로 받아치고 싶지는 않았다. 자세하게는 보이지 않아도 사내가 부러 잔동작을 취하는 것이 보였다. 저 보라고 하는 짓이다. 아까 반사적으로 오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걸 구실로 저를 놀려먹으러 이 먼 곳까지 온 것이라는 생각에 어떤 이견도 없다. 사내의 몹쓸 행적에 휘둘리는게 한두번이냐며 관자놀이를 메만졌다. 뜸을 들이던 입술이 열린다. 세상에 수다쟁이에게 침묵을 선사할 방법이 키스말고 더 있겠나? 있다고, 이렇게 패면 된다고 사내의 멱살을 들이키고 싶은 것을 겨우 눌렀다. 한숨에 푸념이 섞인다. 너 같은 호색한을 용납해줄 세상은 없는데. 말에 사내가 얕궃게 쏘아붙인다. 그 세상이 자네인가? 어느새 안경은 사내의 콧등에 아슬아슬하게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자네 말고 그걸 문제 삼지 않는 세상은 넓고 깊다네. 본능을 너무 경계하는 거 아닌가? 흐릿한 너머로 쏘아붙이는 사내가 흐릿하다. 또 위화감 투성이. 청록색 얼룩이 또 사내의 얼굴 한마당에 드리운 듯 했다. 무어라 말을 하려다 사내가 빙긋 웃는다. 위화감은 순간이다. 그 땅에 사내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던 순간처럼. 인식의 너머에 사내가 있는 것 같았다. 자기가 무슨 신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한다. 원체도 이상과 본능은 거리가 멀어 피하고 싶다는 말 대신에 사내의 위화감이  한 방울 흘러들어 말을 엉키게 한다. 본능이 아니라 너를 경계하는 거겠지. 목구멍에서 말은 그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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